인권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인권은 현대인들에게는 당연시되고, 절대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제로 이 개념이 세계인들에게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근대에는 수많은 전쟁, 학살, 차별이 발생했고, 세계 2차대전 이후에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무자비하게 다루어지는 현상이 되풀이되면 안된다고 판단한 유엔에서 1948년에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고 이에 근간한 헌법이 세계 각국에서 제정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 가져야할 권리를 크게 생명권, 자유권, 평등권으로 나누어서 정의했고 아직까지도 각국의 헌법이 적용되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적용되야 할 권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권이 가지는 절대성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인권과 충돌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법률상으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생명권을 침해하는 살인, 자유권을 침해하는 납치, 평등권을 침해하는 성차별 등 인권의 세 가지 요소 모두에서 그들의 침해 사례를 적극적으로 방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률 덕분에 사회 안에서 인간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강력하게 설정된 법률은 때때로 도덕적, 윤리적으로 생각할만한 지점들을 만들곤 합니다. 그 중 한 예시가 안락사 문제이며, 이 경우 개인의 생명권 포기 의사와 인권의 생명권 및 이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 충돌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던 인권의 절대성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옳지 않은 행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안락사 요청을 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삶보다 죽음이 더 가치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고 좁혀지지 않는 두 의견의 격차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의료윤리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영화 “씨 인사이드” 에서는 이런 안락사를 주제로 다룹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라몬 삼페드로의 안락사 요청을 재구성한 영화로, 라몬이 사지마비자가 된 사연부터 줄리아와 함께 안락사 허용을 요청한 재판을 준비하지만 실패하고 책을 출판하는 과정, 결국 로사의 도움으로 28년간 지속되었던 사지마비자로서의 삶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마무리하는 과정까지를 다룹니다. 주인공 라몬이 보여주는 수많은 행동과 그에 대비되는 그의 상상 및 주변의 자유로운 모습들은 평소 비장애인이 겪어보지 못한 그의 어둡고 불편한 삶을 간접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고, 라몬이 하는 말들은 그가 얼마나 그의 삶이 가치없다고 생각하는지와 얼마나 죽음에 진심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라몬의 상황과 생각에 공감을 유도하며 자연스럽게 “이정도면 안락사를 허용해줄만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 만듭니다. 법적으로는 불법이지만, 도덕과 윤리에 호소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마치 폭행이 법적으로는 허용되어 있지 않지만 자신을 방위하기 위한 폭행으로 판단될 경우 정당방위로 인정하여 무죄로 판결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모든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지는 않더라도, 라몬의 경우에는 안락사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 관객들에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비첨과 췰드리스가 제시한 생명의료윤리 원칙의 자율성 존중의 원칙에 따르면 이와 같은 딜레마 상황에서 환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라몬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라몬 스스로 안락사를 원한다는 판단을 했고 이러한 판단을 최대한 존중해서 들어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온전하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의 판단이 자발적이고 의도적인지, 숙고 후 행위를 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20여년 이상의 시간동안 꾸준했던 그의 가치관, 사고와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는 모습을 보여줌을 통해 자발성 및 숙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그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사회인 형 및 형의 가족들, 그리고 약 2년의 시간동안 함께 보낸 즈네, 줄리아, 로사 와의 충분한 의사소통을 한 것도 드러났습니다. 긴 기간동안 사회와의 의사소통을 거치고도 꾸준하게 보여온 그의 확고한 가치관은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온전히 적용되기에 무리가 있다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생명의료윤리의 원칙 중 가장 명백하고 직관적인 원칙인 해악 금지의 원칙에 따르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판단은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없습니다. 라몬의 경우에는 안락사에 대한 요청이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이 타인에게 신체적인 상해를 입히진 않습니다. 정신적인 상해에 대해서는 그의 형과 아버지에 한해서는 고려해볼만 할 수 있습니다. 라몬의 형은 자신의 집안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강경한 의견이었고, 라몬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는것도 슬픈데, 더욱 슬픈 것은 아들이 죽고 싶어하는 것” 이라며 라몬의 안락사 요청에 대해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해악 금지의 원칙이 반박의 여지가 적은 명백한 원칙이지만, 이는 신체에 대한 해악과 같이 명백하게 보이는 요소에 대해서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신에 대한 해악을 고려하는 것 자체의 취지는 좋지만 신체에 대한 해악에 비해 명확하지 않은 주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 비중을 낮게 가져가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라몬의 안락사 요청은 해악 금지의 원칙에도 크게는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료윤리의 선행의 원칙은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에게 행하는 행위의 윤리적인 판단을 고려할 때 사용되는 원칙이며, 이 경우는 라몬의 요청 행위에 대한 정당화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용 범위가 맞지 않다고 보입니다. 더불어 정의의 원칙 또한 의료진의 기준에서의 의료 자원의 분배와 관련된 행위의 윤리적인 판단을 고려할 때 사용되는 원칙이기 때문에 적용범위를 벗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간섭주의적 관점입니다. 간섭주의는 환자의 자율적인 판단을 억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경우가 있음을 시사하며, 라몬의 안락사 요청에도 간섭주의가 적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학적 간섭주의는 의사가 환자에게 선이 될 수 있는 부분을 강요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시각이며, 여기서의 선은 환자가 느끼는 선이 아니라 의사가 판단하는 선이기에 라몬의 경우에는 생존을 강요할 수도 있어보입니다. 하지만, 의학적 간섭주의는 의사가 환자보다 병이나 상태에 대해서 월등하게 높은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선의 증진이 치료를 통한 호전이 아닌 이 경우에는 병에 대한 지식보다 환자의 심정이나 감정에 대한 것들이 판단에 더 도움이 되는 지식이라고 볼 수 있고, 20여년 동안을 사지마비자로 살아온 라몬보다 의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라몬의 상태와 심정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온정적 간섭주의는 더욱 명확하게 환자의 선과 행복을 이유로 강요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시각인데 라몬의 선과 행복은 앞서 보여진 오랜기간의 꾸준한 가치관에서 드러난 죽음이기 때문에 간섭을 하더라도 안락사 요청을 허락하는 형태로밖에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온정적 간섭주의를 이유로 라몬의 안락사 요청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라몬의 안락사 요청은 비첨과 췰드리스의 생명의료윤리 원칙에 의하면,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온전하게 적용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해악 금지의 원칙에 크게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섭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라몬의 요청을 기각할 수 있는 부분은 없으며 윤리적으로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져야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